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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cson을 다녀와서-김 민숙 선생(48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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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487회 작성일 02-08-09 00:00

본문

  
'2000 가을
Tucson을 다녀와서

                                                                                              
                                                                                                서울48기 김 민 숙


  또다시 일상이다.
시시때때로 눈앞에 아른거리더니만, 이제는 생각을 해야만 생각이 나는 무심한 시간들이
벌써 흘렀나 보다. 왠지 정리라도 하면 빨리 잊혀질 것만 같아 모든 것을 서랍 장 속에
그대로 넣어 둔 채 그렇게 그렇게 지내 오다가, 이제 서야 뒷정리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본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4개월된 아이를 두고 course에 참여 하게 된 나를 두고 주위에서는
대단한 학구파로, 내지는 몰 인정한 아이엄마로 운운들 하였는데 몰 인정한 아이엄마로
불리는 게 싫어서 대단한 학구파를 자처하며 비행기에 올랐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하여서 만나게 된 현지에 거주하고 계시는 의국 출신의 천경아 선생님을 만나는 순간,
쇼크와 함께 진한 감동을 받았다. 천경아 선생님은 젖먹이 아이를 도우미 여동생과 함께
데리고 왔는데, 밤에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아침이면 제시간에 나와 2주 동안의 전 과정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참여 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한국의 낭자군은 어느 분야에서나
금메달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방대하였는데, 우리가 찾아간 아리조나주의 Tucson은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붐비는 차와 높은 빌딩들 속에서 쫒기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는 모처럼 여유로운
생활 속에서 공부하기에는 딱 좋은 환경인 것 같았다. 흥분과 기대 속에서 우리의 일정은
시작되었다.

첫 스케줄은 현지적응 훈련.
  우리는 말로만 듣고 사진 속에서나 보았던 Tweed Foundation 본부를 답사하고
곧장 Old Tucson 과 Dessert Museum으로 향했다. Old Tucson으로 가는 길은
gun man들이 등장하는 서부영화를 촬영하기에 딱 좋을 정도로 광활하고 황량했다.
실제로 Old Tucson Studio에는 죤웨인 포스터가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관광객들도 그의 팬들인 듯 향수 어린 눈빛들이었다.
우리는 Old Tucson을 거의 샅샅이 다 돌아 보았는데, 그 중의 압권이라면 '백작부인들의
사진촬영' 이 아니었나 싶다.
용감 무쌍한 4여인이 등장하였는데, 그들은 그 시대 백작 부인들이 입었을 듯 싶은 앞뒤
확 파인 드레스를 입을 때 속의 옷을 벗네 안 벗네 설왕설래 하더니만 어느순간 '프로 선언'
이라도 한 듯, 새털이 나부끼는 챙 넓은 모자에, 숄에, 기타 소품들까지 거의 완벽하게
100 여년 이전으로 돌아들 갔다.
실제로 옷이 날개라드니, 백작은 그만두고 방자정도 되는 그의 시종이라도 있다면 손을
맞잡고 춤이라도 한 바퀴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참으로 아쉬운 마음으로 드레스를 벗었다.
촬영비 생각해서 사진도 딱 한번 밖에 찍지 못하고, 그 부인들은 그 시대 그대로 나의 책상
한쪽에 있는데, 마치 그 시대의 내가 back to the future해서 지금 여기에 나와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오는 길에 Dessert Museum 에 들렸다.
  파충류, 특히 뱀들이 다양했는데, 그것들은 그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도처에
흩어져 놀고 있는 것들을 한 장소에 모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손가락 크기의 까멜레온,
도마뱀들은 흔하게 눈앞에서도 돌아다녔고, 너무나 보호색이 정교하고 섬세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이다. 저 어딘 가에는 박물관에서
보았던 수많은 뱀들도 꿈틀거리고 있겠거니 생각하니, 덥다고 반바지에 샌들차림으로
따라 나선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곳으로
대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열심히 적고, 토론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에서 관찰되었다.
보람찬 하루였다.

일요일 아침 8:00부터 course에 들어갔다.
  등록 확인하고 재료받고, 자리 배정 받았는데, 우리 팀들은 우리식의 본관에서 떨어진
별관에 모두 배정받았다. room에 들어가 내 자리를 확인하는 순간, 역시 하느님은 나를
제일 이뻐 하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영어에 약한 나를 배려하여서 모서리는 아니고,
담쟁이 넝쿨과 오렌지 나무 등의 밖의
경관이 제일 잘 보이는 커다란 창문을 내 눈앞에, 게다가 좌로는 대구지부의 늠늠한
두 남선생님, 우로는 주효진 의국 선생님, 앞으로는 김호정 의국 선생님 이라니......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그리고 Annex room으로 이름 붙여진 이 별관은 본관에서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 소외감과
더불어 뭔 가에서 소외 된 듯한 우리의 정신적, 심리적 소외감을 제외 하고는 course가
끝나 갈 때까지 우리모두에게 , 또한 instructor 선생님들에게도 별천지, 천국으로 불리웠다.
그런 분위기는 room자체가 본관에 비해 밝고 싼듯한 물리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우리팀의 탁월한 wire bending 실력과 항상 명랑하고 밝게 웃는 우리 선생님들의 예쁜 모습들,
instructor 선생님들 께도 항상 관심을 표현해주며 적극적으로 얘기 하기를 즐겨 하려는
선생님들이 주도 하였던 것 같다.
또한 우리 옆 table에 이라크에서 오신 '박창식' 정도 되어 보이는 모 교수님께서도 항상
우리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여 분위기에 일조하셨다.
  나머지 한 table에는 일본팀으로 구성 되었었는데,
그들은 자국 instructor 선생님이 동행하지 않아서였는지 다른 팀들과 별반 교류가 없었던
것 같아 보였다. 그들은 당일 실습을 끝내지 못해 다음날 아침 일찍이 나와서 실습을
여러 차례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soldering 후에는 손수 가져온 motor로 polishing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 Sony 정신을 보여 주었다.
의외로 나날들이 재미있었다.

처음 4일간 정도는 밤에 거의 잠을 못 이룰 정도로 현지적응을 못하였는데
(일행 중 제일 늦었던 것 같다.)
갓난 아이는 별 탈없는지, 큰아이는 학교에 잘 다니고 있는지,
신랑은 출국 준비는 잘하고 있는지, 걱정은 걱정대로, 재미는 재미대로였다.

   Instructor선생님들은 한결 같이 우리에게 호의적이었고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하시는 것 같았다.
그중 제일 정도가 심하셨던 분은 Dr. 써지오였다. 멕시코에서 오신 이분은 우리를 보자마자
" 용호 리!, 최고! "를 외치셨다.
자신이 연수시절에 Dr. 용호 리께서 instructor이셨다면서, 처음 instructor로 역지사지 되어
한국팀을 가르치게 되니 감회가 남 다르셨던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이제 어느 정도 course에 익숙해 진 것 같아 이 날부터는 6:00시 이전에 일과를
마치고 이후의 시간에는 가까운 데를 둘러 보기로 했었는데 우리의 계획을 알고 라도
있었다는 듯, 5:00이전에 일과를 끝내 버린 우리팀을 놓아주질 않았다. 결국에는 typodont
광을 내기까지 했었는데, 이러한 Dr.써지오를 보고 한쪽에서는 Dr. Krontz에게 잘 보여서
차기 임원을 노리는 것 같다고 평을 하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마도 연수시절 Dr. 용호 리께
받은 분풀이로써 복수의 희생양으로 우리가 선택된 것 같다는 설이 나돌았을 정도이다.
이후에 우리의 Hope 이신 Dr. 박창석께서는 Dr.써지오를 만나면 "써지오!" 하면서
큰 소리로 으르렁(?) 거리셨는데 거의 막역한 사이처럼 보여졌다.
어서 빨리 우리중의 누군가가, 아니 차기 course에 instructor로 참여 하시는 선생님께서는
부디 우리의 한을 풀어 주시길 간절히 부탁 드린다.

  Course 중간의 일요일 날에는 그랜드 케년에 갔었다. 우리의
그랜드 케년 ticket은 공부하는 연수생 중 재미교포 2세로 '희식'이라 분이 특별히 주선한
것이었다.
우리는 하늘을 나는 것이라고는 전투기를 제외하고는 다 타 본 기분이었는데, 타기 전에
room mate, 이종희 선생님이 나눠 준 우황 청심환의 약효 때문이었을까?, 헬기는 전혀
무섭지 않았고, 아니 헬기 하나 있었으면.., 하는 뭐가 하나 부은 듯한 생각 까지 들었었다.
오히려 경비행기 탔을 때(우황 청심환 복용 전), 3rd order 보다는 2nd order에서 속이 약간
뒤틀렸는데, 2nd order에 약하기는 실습에서나 비행기에서나 매한가지였다.
그랜드 케년은 익히 보고 들어와서 발을 내딛는 순간 '여기가 거기야' 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누군가는 사진으로 보는게 훨씬 낫다고 그랬었는데.....
헬기로 광활함을 일견하고, 우리식의 놀이동산의 코끼리 버스를 타고 케년 주변 오솔길을
걸어 보면서 여러 방향에서 햇빛을 받아 되 뿜어 내는 광채들의 아름다움도 감상하고,
그 웅장함에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기분도 좋았었다. 또 7,8년 전 신랑의 사진 속에
등장했던 토끼만한 다람쥐도 여전히 대를 이어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하루 코스로 알차게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재미동포 희식씨 덕분이었다.
이번 course에는 희식씨 말고 도 3세에, 10세에, 또는 10년 개업한 이후에 머나먼 나라에
와서 교정 공부를 하고 있는 선생님들을 만났는 데, 감동스러웠던 것은 어린 나이에 도미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정서' 라는 것이 느껴질 때였다.
우리의 기아 자동차 스포티지를 렌트해서 타고 있는 선생님을 보는 순간부터 무언의
동포애가 느껴졌는데,
그들 덕분에 젊은 대학생들이 술 마시며 노래하는 곳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여러 종류의 술을 우리에게 권했고, 여러 사람들에게 얘기 나눠 주려 애썼다.
우리가 돈 많은 원장들 이라고 말 을 했지만 한사코 계산은 그들이 했는데, 주인으로써
극진히 손님을 대접하려는 우리의 정서가 느껴졌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수련의들로
loan으로 연수에 참여했고,
숙소도 먼 거리에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가슴 뭉클하였다.
Korean fighting!.

  또 다른 월요일이다.
Dr. Krontz는 퍽 자상하며 다독여주는 인자하신 분 같았다.
그분은 첫날부터 나를 놀라게 하셨는데, 대야에 여러 개의 typodont를 담아서 실습실로
나르고 있는 것을 목격 당하신 것이다. 문화적 차이겠지만 '큰 쇼크' 였다.
그분의 강의는 8:00에 슬라이드를 겸한 article한편 읽고, 그때그때 실습 속도에 맞는
실습 강의인데 평범하고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우리에게는 졸리기 까지 하다.
그러나 항상 기대하는 마음으로 참여하였던 것은 강의 슬라이드 하나 하나가 모두 욕심이
났기 때문이다.
내용 보다는 뒷 배경에 신경을 써서 화려하게 꾸미거나, 쇼를 연출하는 듯한 강의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한 장의 슬라이드에 어쩌면 저렇게
간단 명료 하게 압축해서 잘 표현
했을까?. 슬라이드의 고전이자 정통이라는 점이 Tweed technique과 상통 하는 것 같다.
난데없이 '지적 재산권'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또한 Dr. Krontz는 상당히
멋쟁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은발의 할아버지가 청바지에 웨스턴 부츠를 몇 번인가
신으시기도 했는데, 40'c를 넘나드는 더위 속에서 우리는 샌들이 아니면 참기 힘들었던
날들이었다. 우리보다 가까이에서 Dr.Krontz를 지켜보신 Dr. 박창석께서도 상당히 매료
되신 듯, shopping시에 제일 먼저 고른 것은 청바지였다.

   둘째 화요일.
이제는 하루하루가 아쉽게 느껴지는 날들이 었다.
떠나 올 때는 돌아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어찌 된 건지
우리는 하루 하루를 아쉬워라 하고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현지 적응도 되어졌는데......
떠나 올 때하고 판이한 것은 또 있었다.
떠나 올 때 우리의 반장님은 모두의 몫까지 컵라면 한 박스를 사 오셨다. 아마도
이국에서 컵라면으로 '반장 턱'을 내면 대히트 일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또한 환호성을 질렀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반장님 컵라면은 먹을 날이 없었다.(그대로 싸 들고 오셨나?)
현지의 음식들이 생각 이상으로, 왠 만한 국내의 음식점 이상으로 맛이 있었다.
육류 고기들의 요리도 맛이 있었는데, Pinacle Peak에서 라면 cow girl 정도는 거뜬히,
cow boy도 도전해 보고픈 마음이 들 정도로 맛이 있었다.(그 동안 너무 못 먹고 살았나?)
날이면 날마다 거르지 않고 몽땅 먹어서 다이어트 걱정도 하였지만 의외로 체중은
늘지도 않았다.
정말 희한하고도 행복한 날들이었다. 국내에서는 물만 먹어도 찌는 살들이었는데.

  하나 더 얘기한다면,
떠 나올 때 40'c가 넘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나?, 더위에 약한 나는 조금은 고민했었다.
40'c가 넘는 것은 사실 이었다. 그러나 사막 기후라서 습기가 없고 가끔은 바람도
있어서 이른 아침은 쾌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힘들었던 것은 냉방 시설이
잘되어 있는 실내와 실외와의 온도 차이에 적응 하는 것이었는데 변온동물이 되지
않고서는 거의 힘들 것 같아 우리는 주로 긴팔 셔츠를 하나씩 들고 다녔다.
Instructor 선생님들도 Dr.Krontz를 비롯한 인근 서남부 지역 출신 선생님들은 잘
적응 하셨지만 같은 미국이라도 먼 곳에서 오신 선생님들은 콧물 감기를 거의
매일 달고 다니셨다. 하물며 바다건너, 아니 대양을 건너온 우리 선생님들은?
더러 감기에 걸리셨는데, 그 감기는 12시간이 넘는 비행기 안에서 떨었던
추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행히 출산 몸조리의 뒤끝이라고 따뜻하게 옷을
준비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얘기하면,
2주 동안의 실습과정이 별로 지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내 Tweed course는 3일, 또 다른 3일, 나눠서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이
후끈 후끈, 팔다리가 뻐근 뻐근했었기에 아예 포기 하는 마음으로 왔었다.
정말 의외였고 신기하기까지 해서 주위 선생님들과 원인 분석까지 했다.
첫 번째 이유라면, case가 난이도 순으로 순차적 진행이 되어서 wax form전체를
개조 하는 등의 불필요한 시간 소모가 전혀 없었다는 것. wax자체가 좋았다는 것도
이유 랄 수 있는데,
국내에서의 hand-made typodont가 아닌 wire-made typodont가 가능한 정도이다.
우리는 비장의 무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챙겨 들 왔었는데, Dr.Krontz의 실습강의
시에 부탁의 말씀도 있었고, 여기까지 와서 hand-made를 해야 하나 싶기도 해서
wire에 맡겨 보았는데 비교적 wire의 뜻이 잘 표현 되어 나타났다.
별다른 상처나 수술 흔적이 없는 나의 typodont를 보고 Dr. 써지오는 당신의 환자는
행복하겠노라고, 어디선가 익히 들었던 말을 내게 했는데 순간부터 Dr. 용호 리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
아침에, 식사후 오후 강의 들으러 본관을 오가며 바깥 바람을 쐴 수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떠나기 전 생각들과 다른 것들은 이외에도 많았는데
궁금하신 분은 직접 느껴 보시기를......

  일주일이 다 지나도록 수영한번 못하여 하루는 수영하는 날로 정했다.
밤에 조명 받아 가며 하는 야외 수영은 또 생전 처음이라, 그리고 너무도 오랜만에
하는 수영이라 '뜨기는 할까?' 하는 마음이었는데 의외로 다양한 폼들이 다나와
물들을 어지럽혔다.
모처럼 하는 운동이라 너무 상쾌하였는데 더 좋았던 것은 뒤풀이 pool. 따뜻한 물이
나오는 pool에서 또 다른 4여인이 밤이 이슥하도록 조명을 받아 가며 미국 하늘
저 멀리, 멀리 까지 Korean language를 띄워 날리고 있었다. 한국에 계신 분들 중
유난히 귀가 가려운 분이 계셨으리라. 12시가 다되도록 깔깔대며 나눈 이야기는
'삶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 정도로 주제 지을 수 있는 살아 가는 이야기들이었는데,
여자 넷이 모였으니 그 삶이 오죽 했으랴.

  떠 나오기 전날.
Double Tree Hotel swimming pool에서 farewell party가 있었다. 사진들도 함께
찍으며 즐거운 시간들이 었지만 아쉬움을 다 채워 주지는 못하였다. 다른 나라 팀
보다 조금 먼저 나와서 짐을 꾸리며, 내일이면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과 아쉬워
떠나기 싫어하는 상반된 두 마음이 한 가슴 속에 공존 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course기간 중 신랑 마져 중국 학회 참석이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왔었는데, 그 이상의 것을 배우고 느꼈다고 생각되며 가족들 또한 모두 자기의 자리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가족애가 더욱 돈독 해 졌다. 어떤 날인가는 hotel room에
돌아와 보니 전화 message sign이 깜박거리고 있어 받아 보니 신랑이 남겨 놓은
것이었다.
매일 전화 통화 했었는데도 이렇게 message까지 남겨 놓을 정도의 낭만이 있었었던가?
이따금씩은 떨어져 생활해 볼 일이다.

  돌아오는 날.
Dr. 박창석님과 나를 포함한 4분 선생님, 나머지 8분 선생님, 2팀으로 나눠졌는데
LA에서 헤어졌다.
나머지 분들은 여행을 더하시고 우리 일행은 go home이다.
LA공항에서 7여 시간의 짜투리 시간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공항에서
보내지 않고 여행 가이드를 call하여 시내관광을 하였다. Dr. 박창석님의 배려였다.
사실 이번 course에 참여하게 된 것을 나는 여러 면에서 행운으로 느끼고 있는데,
course가, 여행이 즐거웠던 이유중의 하나는 아마도 Dr. 박창석님과 함께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할 정도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즐겨 하셨고, 여러 면에서 많이
배려 해주셨다. LA down town등을 돌아보며, 도로 보도블럭 위에 star이름이
새겨져 있는 star들도 밟아 보고, 박찬호 선수가 근처에 살고 있다는 저택 단지들,
한인 town, 레돈도 비치 에서의 crab 망치로 패 먹는 등의 시간으로 미국이 황량한
땅에 전신주처럼 멀대 같이 서있는 선인장들만 많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LA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면서 떠나 올 때가 생각났다.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참으로 많은 사건들을 겪었었는데, 무릇 사건이 없는 여행은
오래 기억 되지 못하는 법. 우리는 오래, 아주 오래 기억 시키고야 말겠다는 듯 꼬리
에 꼬리를 물고 사건을 이어 갔다.
   떠나 올 때 여권을 잃어 버려 출발 직전 극적으로 여권을 찾았던 일, 비행기표는
너무 자주 분실 하였는데, 한결 같이 happy ending으로 마무리 되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걱정들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사건으로는 콘센트에 plier 넣어서 plier태워 보기, 한 밤중 음주 상태에서
일방 통행로를 역으로 달리며 고함치는 반대쪽 사람들에게 "왜들 저러지, 아무
잘못도 없는데." 하고서 주위 경찰도 아랑 곳 하지 않고 끝까지 갔던 일, 어떤 날은
하늘도 우리를 도와 천둥 번개 요란하더니 정전으로 인한, Tweed course이래
처음으로 단축 수업하는 천재지변 까지 우리의 사건일지를 더해 주었다.
또 한가지 이번 여행의 옥의 티라고 할 수 있었던 사건은 Tweed course 등록비의
오차였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다음 정기 총회 때 감사보고에서 보고가 있을 것으로 기대 해
보기로 했다. 모두다 스릴과 써스펜스 있는 사건들이라 어느 것에 금메달을 줄 것인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team work이 더 끈끈해짐을 느꼈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 보려는
쥐들의 모임 같은 것도 갖곤 했었다. 짧은 영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course가
나름대로 보람차고 즐거웠다고 자평할 수 있었던 것은 동행하신 모든 선생님들의
오고 가는 도움 덕이었다고 생각 한다.
모두들 주연으로, 때로는 서로의 조연으로 일생의 일정 시간, 일정 사건에 대한 공동
운명체로써 동고동락 했었다는 진한 동지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함께 course 83에
참여 했던 모든 선생님에게 큰 발전이 있기를 기도 하며 정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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